fnctId=bbs,fnctNo=1674 RSS 2.0 20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 작성자 suesue 조회 374 첨부파일 0 작성일 2023.02.03 ▣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 ◎ 크 기: 32.2x10.2x1269.4cm ◎ 시 대 : 1116년(예종 11년) ◎ 지정구분 : 보물◎ 지정(등록)일 : 2022. 12. 27. 대방광불화엄경 권88은 1권 1첩으로 고려 선종 4년인 1087년 고려사회에 들어온 ‘대방광불화엄경소’ 총 120권 목판 중 권88에 해당하는 불경이다. 재질은 닥종이, 판종은 목판본, 형식은 절첩장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으로도 부르는데, 부처가 성도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전을 뜻한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중심사상을 담고 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핵심 경전으로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화엄경소(華嚴經疏)는 중국 당나라 승려 징관(澄觀·738~839)이 화엄경을 해석하고 여기에 송나라 승려 정원(淨源·1011~1088)이 쉽게 풀이한 것이다. 이 판본은 책의 저자인 정원이 고려 대각국사 의천에게 보낸 목판으로 120권을 찍어낸 것 가운데 권88애 해당한다. 표지는 상수리나무즙으로 염색한 종이에 중앙의 표지 서명을 금니로 기재하였다. 한 장은 5면씩 접혀 있으며 한 행은 15자로 적혀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에는 五(오)가 시계 방향으로 찍혀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소 권88’엔 책의 마지막에 보이는 ‘정화병신오월경조(政和丙臣五月敬造)’라는 조성 기록이 있어, 고려 1116년(예종 11) 5월에 판각한 경판으로 인출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방광불화엄경 권88은 보존상태가 우수하고 국내에 전래된 같은 판본의 ‘대방광불화엄경소’ 가운데 유일하게 알려진 권차이다. 고려사 작성자 suesue 조회 1748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5.06 ▣ 고려사 (高麗史) ◎ 수 량 : 139권 75책 ◎ 크 기: 27.5×18.3cm ◎ 시 대 : 1613년(광해군 5) 간인, 17∼18세기 후인(後印)◎ 지정구분 : 보물 제2115-4호◎ 지정(등록)일 : 2021. 2. 17. 『고려사』는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이 1451년(문종 1)에 기전체(紀傳體)로 찬진한 고려의 정사(正史)로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정사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고려사』는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되지 못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고려국사』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해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의 내용이다. 『고려사』는 1455년(세조 1)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금속활자 판본과 그 뒤 중종 연간(1506∼1544) 을해자 판본을 목판에 다시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1482년(성종 13)에 을해자로 간행한 판본, 1613년(광해군 5)에 을해자본을 번각(飜刻)해 새진 목판본의 초간본, 1613년에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의 후대 간행본(17∼18세기 추정)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고려사』는 고려의 정사(正史)로서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라는 점, 비록 조선 초기에 편찬되었으나, 고려 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고려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문화사?문헌학적 가치가 탁월해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의의가 충분하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보물 제2115-4호 ‘고려사’ 139권 75책은 을해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이다. 총75책(139권)으로 제1책에는 ‘목록상(目錄上)’, ‘목록하(目錄下)’, ‘고려세계(高麗世系)’? ‘범례(凡例)’,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수사관(修史官)’ 이 수록되었고, 권1부터 순서대로 1권 혹은 2권씩 수록되었는데, 대부분은 2권씩 수록되었고 제25책, 제26책, 제28책∼제31책, 제43책∼제44책, 제48책, 제58책, 제63책 등 11책은 1권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표지의 좌상단에는 ‘여사(麗史)’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권차 표시 대신 고려사의 총권차 표시가 작은 글씨로 묵서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사고본 고려사에서는 책의 가장 뒤에 배치된 ‘修史官’이 이 판본에서는 책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고, 사고본 제2책의 첫머리에 배치되었던 ‘진고려사전’이 이 판본에서는 ‘고려세계’와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판본에서는 장정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이 있다. 즉 제21책에 수록된 권39와 권40이 순서가 서로 바뀌어 권40과 권39의 순서로 장정되어 있다. 책의 크기는 27.5×18.3cm 내외로, 조사 대상 『고려사』 가운데 가장 작은 크기이다. 판식을 보면 광곽은 사주단변(四周單邊)에 반곽의 크기는 19.6×14.2cm 내외이다. 을해자본 및 사고본과 비교할 때 책의 크기가 작아지고, 광곽 역시 을해자본과는 세로의 길이가 약 1.5∼2.0cm, 사고본 보다는 약 0.5∼1.0cm 정도 줄어든 상태를 보여주고 있어 활자본 및 목판 번각본의 초쇄본과 후쇄본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 판본은 규장각에 소장된 사고본과의 판식, 서체의 인출 상태를 고려할 때 초간본 인출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인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열전 권제23의 권수제면에는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홍진(洪進, 1541∼1616)의 장서인으로 판단되는 ‘당흥부원군장(唐興府院君章)’ 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홍진의 소장본이었던 초인본으로 결권을 보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작성자 suesue 조회 1163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5.06 ▣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 屛風) ◎ 수 량 : 1좌(4폭) ◎ 시 대 : 조선시대 ◎ 지정구분 : 보물 제2080호 ◎ 지정(등록)일 : 2020. 10. 21 보물 제2080호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선조 연간(1567∼1608) 녹훈(錄勳)된 구공신(舊功臣) 및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 11월 충훈부(忠勳府)에서 상회연(相會宴)을 진행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당시 상회연에 대해서는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 상회연에서 선온(宣?, 왕이 하사한 술)을 하사받은 것을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선조에게 올렸다는『선조실록』권181, 37년(1604) 11월 13일자 기사를 통해 실제 거행 사실 및 개최 경위를 알 수 있다. 상회연의 신ㆍ구공신은 1590년(선조 23) 2월 1일 녹훈된 광국?공신(光國功臣:『대명회전(大明會典)』등에 잘못 기재된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는데 기여한 공신)과 평난공신(平難功臣: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신) 42명, 1604년(선조 37) 6월 25일 녹훈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신),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운 공신), 청난공신(淸難功臣: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신) 109명을 포함한 총 151명이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의 좌목에 적힌 공신들은 1604년 상회연 당시 생존해 있던 63명의 명단으로, 이중 5명(이산해, 류성룡, 정탁, 이운룡, 남절)은 노환(老患)으로 불참했으므로, 실제 행사에 참석한 인원은 58명이다. 좌목은 공신 명칭, 문무관 품계, 자, 생년, 본관, 이름순으로 기재되었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총 4폭으로 구성되었다. 왼쪽 제1폭은 상회연의 장면을 그린 것이고, 제2폭∼제3폭에 걸쳐 참가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며, 제4폭은 위쪽의 제목을 제외하고 내용은 비어 있다. 각 폭은 비단 2쪽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이어 붙였으며, 제2폭부터 제4폭까지 위쪽에 붉은 선을 그어 구획을 하고 그 안에 전서체로 제목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라고 적었다. 흰 차양 아래 3단의 돌계단 위에서 공신들이 임금이 하사한 술을 받는 장면이 중앙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 옆에서 음식을 화로에 데우는 모습 등 준비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 그려진 공신들의 숫자와 실제 참석자는 58명으로 일치하며, 위에서 내려 본 부감시(俯瞰視)로 특징만 포착해 선묘로 간략하게 그린 특징은 17세기 기록화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원경의 눈 덮인 설산(雪山)과 앙상한 나뭇가지 표현은 상회연 개최 시기인 음력 11월 상순이라는 계절감을 전달해 주며,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단정하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공신 관련 그림으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이라는 점, 제작시기가 명확해 기년작이 드문 17세기 회화 양식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관북여지도 작성자 suesue 조회 1271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5.06 ▣ 관북여지도 (關北輿地圖) ◎ 수 량 : 1첩(13면) ◎ 시 대 : 1738(영조 14) ~ 1753년(영조 31) 사이 ◎ 지정구분 : 보물 제2061호 ◎ 지정(등록)일 : 2020. 2. 27 보물 제2061호 ‘관북여지도(關北輿地圖)’는 표기된 지리와 표현방식 등으로 보아 1738년(영조 14)~1753년(영조 31)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첩의 지도집으로, 조선시대 관북(關北) 지방인 함경도 마을과 군사적 요충지를 그린 것이다. ‘관북여지도’는 1719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삼(李森, 1677~1735)의 지시로 제작된 함경도 지도집의 계보를 잇고 있는 작품으로, 조선과 청나라 정계(定界)를 전후로 함경도 지방 방어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각 면마다 회화식으로 자세하게 표현되었고, 여백에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호구수(戶口數), 군사수(軍士數), 역원(驛院) 등 지리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78년(숙종 4)의 무오식년(戊午式年)의 호구가 등재된 점, 숙종 1684년(숙종 10)에 도호부로 승격된 병마첨사의 무산진(茂山鎭)이 그려진 점, 숙종 38년(1712) 세워진 정계비(定界碑)가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점 등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관북여지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봉수(烽燧) 사이의 연락 관계를 실선으로 직접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함경도 지도 뿐 아니라 기타 지방지도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참신하고 새로운 방식이다. 아울러 봉수 간의 거리를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이용자의 편의를 극대화하였다. 화사한 채색의 사용, 산세에 드러나는 준법(?法), 강에 표현된 물결 등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회화적 수준 또한 높다.이러한 점으로 보아 보물 제2061호 ‘관북여지도’는 현존하는 북방의 관방 군현지도 중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고 보존상태도 매우 좋다. 또한 함경도와 야인(野人) 지역을 구분하거나, 봉화망과 봉화봉 간의 거리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 봉화(烽火)의 신호법 등을 자세하게 표시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지도발달사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존하는 ‘관북여지도’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므로 보물로서 지정가치가 인정된다.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작성자 suesue 조회 1268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5.06 1면 32 x 46xm 2면29.7 x 47.7cm 3면 31.4 x 32.7cm 4면 30.4 x 32.9cm 5면29.9 x 46.3cm 6면30.8 x 38cm 7면30 x 21.1 cm 8면 31.2 x 30.5cm 9면 30.4 x 39cm 10면30 x 46cm 11면30.3 x 41.8 cm12면30 x 46.7 cm13면30.8 x 30.8 cm14면27.2 x 42.8cm ▣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金允謙 筆 嶺南紀行畵帖) ◎ 수 량 : 1점(14폭)◎ 크 기 : 전체 35.7 x 54.5cm ◎ 시 대 : 조선시대(18세기 후반) ◎ 지정구분 : 보물 제1929호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은 본관이 안동으로,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默樵) 등이다. 문인화가이기도 한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서자로 부친의 그림 취미를 이어 개성적 화풍을 이루었다.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로 사대부로 현달(顯達)하지는 못했으나 소촌역(召村驛) 찰방을 지냈다. 김윤겸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같이 활동하였으나, 화풍상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간단하고 짧은 필선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담채를 살짝 곁들여 추상미가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소재로는 진경산수화가 가장 많은데, 그가 평생 전국을 유람하며 체득한 실경의 감흥을 그만의 개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윤겸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중 특유의 개성과 넓은 지역의 다양한 실경산수를 남겨 회화사상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김윤겸의 작품은 꽤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영남기행화첩 은 주로 부산, 경남 일대의 지역의 경승을 그린 14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일부는 현재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후기 선비들의 여행과 시문서화 예술의 창작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영남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14폭의 작품을 남겨, 지방자치 시대인 현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 작품 자체로도 김윤겸의 회화를 대표할 만한 높은 수준으로, 비록 원래화첩의 모습은 아니고, 일부 결실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 상태로도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 양산 금조총 출토유물 일괄 작성자 suesue 조회 1367 첨부파일 0 작성일 2021.05.03 1. 금제 새다리 길이 2.8cm 발가락 길이 0.6cm 2. 금제 귀걸이 길이 9.4cm중심고리 직경 3.1cm너비 1.3cm 3. 금제 귀걸이 길이 7.2cm 중심고리 직경 3.0cm너비 1.0cm 4. 금제 팔찌 길이 7.6cm두께 0.5cm 5. 은제 허리띠 띠고리 1점, 띠꾸미개 30점, 띠끝장식 1점띠고리 길이 4.5cm 너비 3.5cm띠꾸미개 길이 6.9cm 너비 2.9cm띠끝장식 길이 11.2cm 너비 2.7cm 6. 청동제 자루솥 높이 10.3cm입지름 11.1cm손잡이 길이 11.1cm손잡이 회양목 ▣ 양산 금조총 출토유물 일괄 (梁山 金鳥塚 出土 遺物 一括) ◎ 수 량 : 6건 40점◎ 시 대 : 삼국시대◎ 지정구분 : 보물 제1921호 양산의 금조총 출토 일괄유물은 경주에서 벗어난 양산 지역에서 발전된 신라의 고분 문화의 전파와 계보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제작 시기는 경주에서 발견된 귀걸이와 금제 팔찌 등과의 양식적 비교를 통해 삼국시대 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견된 태환식 귀걸이 가운데 누금세공으로 아로새겨진 귀갑문 귀걸이는 경주 보문동 부부총 귀걸이와 함께 신라 귀걸이 가운데 가장 정교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발견된 금제 조족(鳥足)은 비록 소품이지만,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이 고분의 가치와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 이 밖에도 거치형(鋸齒形)으로 외형을 장식한 금제 팔찌. 은제 투조 과대도 경주지역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사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삼족 없이 새의 뉴가 장식된 독특한 기형의 청동 초두(?斗)도 삼국시대 초두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 작성자 yoojin95 조회 4313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 ( 沈之伯 開國原從功臣錄券 ) ◎ 시 대 : 조선 (1397년) ◎ 재 질 : 종이에 목판활자◎ 크 기 : 30.5×135.0cm ◎ 지정구분 : 국보 제 69호 공신녹권은 왕조의 창업이나 국가적 중대사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발급된 공신증명서이다. 개국원종공신이란 개국 의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잠저 때부터 신변을 지켜주고 대업을 적극 권고한 공로가 있는 신하를 말한다.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원년(1392) 10월부터 6년(1397) 12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발급하였고, 그 중 하나가 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이다.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6년 10월 공신도감에서 전 조봉대부 사재부령 심지백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녹권에는 심지백을 포함하여 모두 75명의 원종공신의 이름이 쓰여 있고, 이들 각 공신에게 전 15결을 상으로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손에게는 음직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아 이 녹권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필사본인데 비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목활자인쇄본이라 인쇄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동궐도 작성자 yoojin95 조회 5291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동궐도 ( 東闕圖 ) ◎ 시 대 : 조선 (1828-1830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 크 기 : 16 폭 병풍 . 전체 274.0×578.2cm 각 폭 1-16 폭 274.0×35.0cm , 2-15 폭 274.0×36.3cm ◎ 지정구분 : 국보 제 249-2호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궁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작품으로 거대한 궁궐과 산수가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도 동궐도가 있는데 고려대본은 16개의 화첩으로 이뤄졌으며 각 화첩 표면에 동궐도 인일(人一) 등으로 표기된 제첨이 붙여 있다. 여기서 인(人) 표시로 볼 때 본래 동궐도는 천(天), 지(地), 인(人) 3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병풍으로 표구된 동아대 동궐도도 본래 화첩이었으며 천 또는 지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동궐도는 비단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과 정원, 연못 등을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으로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부감법과 함께 웅장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평행사선구도가 사용되어 궁궐과 주변 경치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현존하는 궁궐 그림 중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동궐도가 3본이나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동궐도 제작에 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제작연대와 작가, 제작 의도, 그림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제작 시기는 1828년 1월 이후 1830년 8월 이전으로 추정되며 제작을 주도한 인물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던 효명세자로 생각된다. 동궐도는 장대한 크기와 규모 면에서 또한 정교한 묘사에 있어 동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궁궐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사 유묵 작성자 yoojin95 조회 518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안중근의사 유묵 ( 安重根義士 遺墨 )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 시 대 : 대한제국 (1910년) ◎ 재 질 : 종이에 묵서◎ 크 기 : 134.0×32.5cm◎ 지정구분 : 보물 제 569-6호 안중근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쓴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부터 3월 26일 사형 전까지 약 40일간 200여 점의 유묵을 썼는데 이는 모두 일본인들의 요청에 의해서이다. 일본 자국의 최고지도자를 사살한 인물에게 필적을 요청하고 이를 기꺼이 써준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안중근의 인격, 정신사상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200여 점의 유묵 중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 점이 확인되고, 국내 소재 26점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뜻은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고 풀이된다. 이 글은 『논어』「헌문」에서 자로라는 사람이 성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이처럼 의리를 생각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상이 안중근의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체화되었기에 당일의 거사를 완수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모든 유묵 서체는 전형미가 뛰어난 해서나 해행이 중심인데 글씨공부의 토대는 안진경체 계통이다. 글씨는 내용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군인정신을 말할 때는 강철 같은 필획에 삼엄함이 배어 있고, 종교적인 내용일 때는 한없는 평안함이 묻어나온다. 이 유묵은 침착통쾌하면서도 장부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지는 특징이 있다.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2824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조대비 사순청경진하도 병풍 ( 趙大妃四旬稱慶陳賀圖屛風 ) ◎ 시 대 : 조선 (1847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 크 기 : 8 폭 병풍. 각 폭 140.0×56.0cm ◎ 지정구분 : 보물 제 732호 1847 년은 조선왕조 24 대 임금 헌종이 어머니인 왕대비 조씨가 40 세 되는 해이고, 이를 기념하여 정월 초하루에 헌종은 창덕궁의 인정전에 나아가 덕을 칭송하는 글, 사순을 축하하는 글, 옷감 선물 등을 조대비가 계신 곳으로 전달해 드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에 헌종은 문무백관들로부터 축하를 받은 후, 만백성들에게 이렇게 뜻 깊은 국가의 경사를 널리 알리는 글을 내렸는데 이 병풍에는 이러한 행사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신정왕후로 알려진 조대비는 효명세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지만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어 왕비가 못되고,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런 조대비의 사순을 맞이하여 헌종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드리려 했지만 바로 몇 달 전에 조대비의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잔치 없이 진하 행사만 치러졌다. 병풍의 1폭에서 7폭까지는 인정전에서 열린 행사 장면이 길게 펼쳐지고 마지막 폭인 8 폭에는 병풍을 제작하도록 했던 오위도총부의 9명의 대신 이름과 관직명이 적혀 있다. 당시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고 궁궐 경비를 맡았던 오위도총부 신하들이 국가의 경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자신들이 참여했던 행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뜻 깊은 궁중행사를 기록한 그림이었던 만큼 내용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도 화려하게 표현하기 위해 가운데 부분의 인정전을 실제보다 더 크게 배치하고 앞에서 바라보는 방식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함께 사용하였다.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2487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 憲宗嘉禮陳賀圖屛風 ) ◎ 시 대 : 조선 (1844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크 기 : 8 폭 병풍 . 각 폭 115.0×51.0cm ◎ 지정구분 : 보물 제 733-1호 헌종 10년(1844) 조선왕조 제 24대 왕인 헌종이 효정왕후와 치른 가례를 기념하여 제작된 궁중기록화이다. 8세에 즉위한 헌종은 정비였던 효현왕후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10월 22일에 경희궁 숭정전에서 교서를 반포하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바로 이 진하례 광경을 주제로 하여 만든 병풍이다. 제 1폭에는 진하례 때 반포한 반교문이 쓰여 있고, 제 8폭에는 선전관청의 관원 25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이 병풍은 선전관들이 주도하여 제작, 이름이 적힌 모든 선전관들에게 병풍이 나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폭에서 7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한 진하례 광경이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모두 경희궁에서 치러졌으나 그림은 창덕궁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세기에 유행한 진하도 병풍의 특징 중 하나로 실제 의례 장소와 관계 없이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그렸다. 그림은 인정전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이어지는 전각들은 평행사선구도로 질서정연하게 그려졌다. 인정전 대청에는 금관조복 차림의 승지와 사관이 부복하였고, 북향한 대치사관은 치사문을 낭독하고 있다. 원경에 표시된 석조의 무지개 형태 문은 후원의 불로문으로 생각된다. 특별히 불로문을 그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이목구비 표현이 없으며 윤곽에 사용된 필선은 다소 뭉툭하고 굵기의 차이가 있다. 장대한 구도, 화려한 색채, 정교한 묘사로 진하라는 국가의례가 충실히 재현되었으며 국가의 가례를 축하하는 경사스런 분위기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자수 초충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2910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자수 초충도 병풍 ( 刺繡 草蟲圖 屛風 ) 전 傳 신사임당 申思任堂 · 申師任堂 · 申師姙堂 · 申媤姙堂 (1504-1551) 본 本 ◎ 시 대 : 조선 ◎ 재 질 : 목공단에 자수◎ 크 기 : 8 폭 병풍 . 각 폭 65.0×40.0cm ◎ 지정구분: 보물 제 595호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그림을 본으로 하여 수 놓은 병풍이다 . 병풍의 구성내용과 소재는 다른 초충도 그림과 유사하나 표현이 더 정교하고 섬세하며 생동감이 있다 . 제 1폭은 오이넝쿨이 화면 왼쪽부터 뻗어가고 그 아래 두꺼비가 작은 벌레를 노리고 위로 올려보며 곧추 서 있다. 제 2폭은 맨드라미꽃과 그 아래에는 도마뱀이 땅강아지를 향해 뒤돌아 보고 있다. 제 3폭은 원추리꽃이 중심에 자리하고, 뒤쪽으로 작은 들국화가 있다. 제 4폭은 덜 익은 여주열매가 달려 있고, 다 익어 땅에 떨어진 여주를 들쥐 세 마리가 파먹고 있다 . 여주는 현전하는 초충도 회화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소재이다. 제 5폭은 민들레와 큰 패랭이꽃을 배치하였고, 제 6폭은 수박과 작은 들국화, 패랭이를 함께 도안하였다. 제 7폭은 가지와 쇠뜨기, 딸기가 있고, 제 8폭은 곤충 없이 들국화만 단독으로 시문하여 전형적인 초충도 형식과 다르다. 자수바탕은 검정색 공단을 사용하여 색사를 강조하였고, 자수사는 미약하게 꼬임을 준 반푼사이다. 자수사의 색은 황색, 청색, 갈색, 자색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자수기법은 대부분 표면평수를 사용하여 면을 채우고 있으며 때로는 수직, 수평, 사선평수를 배합하였다. 이외 곤충의 몸통은 가장자리수와 이음수, 평수를 혼합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였고, 표면솔잎수도 보인다. 토기 융기문 발 작성자 yoojin95 조회 2945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토기 융기문 발 ( 土器 隆起文 鉢 ) ◎ 시 대 : 신석기시대 ◎ 재 질 : 토기 ◎ 크 기 : 높이 12.2cm, 입지름 16.2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7호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토기이다. 작은 주구(注口), 둥근 바닥, 적갈색 점토질의 태토, 융기문 장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릇 몸체 상부 표면에 V자 형의 점토 띠를 연속해서 붙인 후 그 위에 새김문을 시문하여 장식효과를 내었다. 기원전 6,000-5,000년 경에 제작된 융기문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하며 주로 발(鉢)이나 항아리 형태로 대체적으로 넓은 아가리와 좁고 평평한 바닥이며, 주로 남동부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심지가 부산과 김해이다. 이 토기는 주구가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액체를 담아 따르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선동패총 유적은 지금의 영도구 영선동파출소가 위치한 곳인데 시가지 확장공사로 인해 현재 완전히 파괴된 상태이다.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 작성자 yoojin95 조회 2896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 ( 陶器馬頭飾角杯 ) ◎ 시 대 : 삼국 (5세기) ◎ 재 질 : 도기 ◎ 크 기 : 높이 14.4cm, 총길이 18.8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8호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고분군 중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총 10기를 조사하였다.뿔잔은 제 7호분의 주곽 내부 가운데 벽 근처에서 한 쌍으로 출토되었다. 뿔잔이란 쇠뿔 모양으로 원통형 몸통에 끝이 뾰족한 형태의 용기로 액체를 따르는데 주로 사용하며 흔히 마상배 (馬上杯)라고도 한다. 이 뿔잔 2점은 크기는 서로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형태나 제작수법은 거의 동일한데 원통형 몸통 끝에 말머리와 두 다리를 장식하여 평면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성형과정에서 양질의 점토를 이용하여 조각칼로 전체 표면을 대담하고 힘찬 솜씨로 깎아 다듬은 다음, 구연부 아래는 일부 물 손질한 회전자국을 남기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 가야지역의 무덤에서 간혹 잔과 대각을 분리해서 제작한 것은 출토되고 있지만 뿔잔 몸통에 말머리를 부착하여 대각으로 삼은 예는 처음이며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현재 한 쌍 중 크기가 큰 것은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작은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쌍자총통 작성자 yoojin95 조회 295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쌍자총통 ( 雙字銃筒 )◎ 시 대 : 조선 (1583년) ◎ 재 질 : 철 ◎ 크 기 : 길이 52.5cm, 입지름 1.7cm, 손잡이 길이 6.0cm, 총신 길이 38.4 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9호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휴대무기의 일종이다.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한 뒤 후미의 화약심지에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지화식화기이다. 쌍자총통은 선조대 (1567-1608)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기존의 승자총통은 사격 이후 재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조준사격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여 총신 2개를 병렬로 결합시키고 한쪽 총신에 3층으로 장전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격 가능케 한 것이 이 쌍자총통이다. 이 쌍자총통의 명문에 의하면 선조 16년 (1583)에 서가라는 장인이 만든 것으로 현전하는 쌍자총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쌍자총통은 임진왜란 때 총신이 길고 사격이 편리한 화승식화기인 조총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만 조선의 화약병기 중 유일하게 여섯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이 가능한 개인 휴대용 무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지자총통 작성자 yoojin95 조회 2700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지자총통 ( 地字銃筒 ) ◎ 시 대 : 조선 (1557년) ◎ 재 질 : 철 ◎ 크 기 : 길이 89.0cm, 총구 바깥지름 17.2cm, 총구 안지름 10.5cm, 중량 87.0kg ◎ 지정구분 : 보물 제 863호 주철로 제작한 유통식 중화기로 포의 사정거리는 8, 9백보 (약 1km)이다. 명문에 의하면 “명종 12년(1557) 4월 김해도회소에서 주조된 지자포이며 무게는 일백사십사근육냥이고 감조관은 전 권관 이대윤 , 화포장은 김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도회란 염초 생산에 소용되는 흙과 잡물을 준비하여 생산하는 곳으로, 이곳이 김해이다. 이 총통의 길이는 89cm, 중량 87kg으로, 이 총통보다 한 달 먼저 같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총통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길이가 89.5cm, 중량 77kg으로 당시 총통의 크기는 규격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화포의 제작시기인 명종 12년은 을묘왜변 발발 후 2년이 경과한 시기로 왜구 토벌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총통 제작은 한동안 지지부진하였으나 요동지방에서 동랍철을 무역하기로 하여 명종 11년(1556)부터는 총통주조사업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배경에 의해 지자총통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지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해 각 전선에서 주화기로 사용되어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처음 1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