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ctId=bbs,fnctNo=1674 RSS 2.0 14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 작성자 yoojin95 조회 2542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 ( 沈之伯 開國原從功臣錄券 ) ◎ 시 대 : 조선 (1397년) ◎ 재 질 : 종이에 목판활자 ◎ 크 기 : 30.5×135.0cm ◎ 지정구분 : 국보 제 69호 공신녹권은 왕조의 창업이나 국가적 중대사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발급된 공신증명서이다. 개국원종공신이란 개국 의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잠저 때부터 신변을 지켜주고 대업을 적극 권고한 공로가 있는 신하를 말한다.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원년(1392) 10월부터 6년(1397) 12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발급하였고, 그 중 하나가 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이다.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태조 6년 10월 공신도감에서 전 조봉대부 사재부령 심지백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녹권에는 심지백을 포함하여 모두 75명의 원종공신의 이름이 쓰여 있고, 이들 각 공신에게 전 15결을 상으로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손에게는 음직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아 이 녹권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필사본인데 비해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목활자인쇄본이라 인쇄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동궐도 작성자 yoojin95 조회 2687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동궐도 ( 東闕圖 ) ◎ 시 대 : 조선 (1828-1830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 크 기 : 16 폭 병풍 . 전체 274.0×578.2cm 각 폭 1-16 폭 274.0×35.0cm , 2-15 폭 274.0×36.3cm ◎ 지정구분 : 국보 제 249-2호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궁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작품으로 거대한 궁궐과 산수가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도 동궐도가 있는데 고려대본은 16개의 화첩으로 이뤄졌으며 각 화첩 표면에 동궐도 인일(人一) 등으로 표기된 제첨이 붙여 있다. 여기서 인(人) 표시로 볼 때 본래 동궐도는 천(天), 지(地), 인(人) 3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병풍으로 표구된 동아대 동궐도도 본래 화첩이었으며 천 또는 지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동궐도는 비단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과 정원, 연못 등을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으로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부감법과 함께 웅장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평행사선구도가 사용되어 궁궐과 주변 경치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현존하는 궁궐 그림 중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동궐도가 3본이나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동궐도 제작에 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제작연대와 작가, 제작 의도, 그림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제작 시기는 1828년 1월 이후 1830년 8월 이전으로 추정되며 제작을 주도한 인물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던 효명세자로 생각된다. 동궐도는 장대한 크기와 규모 면에서 또한 정교한 묘사에 있어 동아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궁궐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사 유묵 작성자 yoojin95 조회 2937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안중근의사 유묵 ( 安重根義士 遺墨 )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 시 대 : 대한제국 (1910년) ◎ 재 질 : 종이에 묵서◎ 크 기 : 134.0×32.5cm◎ 지정구분 : 보물 제 569-6호 안중근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쓴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부터 3월 26일 사형 전까지 약 40일간 200여 점의 유묵을 썼는데 이는 모두 일본인들의 요청에 의해서이다. 일본 자국의 최고지도자를 사살한 인물에게 필적을 요청하고 이를 기꺼이 써준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안중근의 인격, 정신사상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200여 점의 유묵 중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 점이 확인되고, 국내 소재 26점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뜻은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고 풀이된다. 이 글은 『논어』「헌문」에서 자로라는 사람이 성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이처럼 의리를 생각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상이 안중근의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체화되었기에 당일의 거사를 완수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모든 유묵 서체는 전형미가 뛰어난 해서나 해행이 중심인데 글씨공부의 토대는 안진경체 계통이다. 글씨는 내용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군인정신을 말할 때는 강철 같은 필획에 삼엄함이 배어 있고, 종교적인 내용일 때는 한없는 평안함이 묻어나온다. 이 유묵은 침착통쾌하면서도 장부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지는 특징이 있다.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151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조대비 사순청경진하도 병풍 ( 趙大妃四旬稱慶陳賀圖屛風 ) ◎ 시 대 : 조선 (1847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 크 기 : 8 폭 병풍. 각 폭 140.0×56.0cm ◎ 지정구분 : 보물 제 732호 1847 년은 조선왕조 24 대 임금 헌종이 어머니인 왕대비 조씨가 40 세 되는 해이고, 이를 기념하여 정월 초하루에 헌종은 창덕궁의 인정전에 나아가 덕을 칭송하는 글, 사순을 축하하는 글, 옷감 선물 등을 조대비가 계신 곳으로 전달해 드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에 헌종은 문무백관들로부터 축하를 받은 후, 만백성들에게 이렇게 뜻 깊은 국가의 경사를 널리 알리는 글을 내렸는데 이 병풍에는 이러한 행사 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신정왕후로 알려진 조대비는 효명세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지만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어 왕비가 못되고,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런 조대비의 사순을 맞이하여 헌종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드리려 했지만 바로 몇 달 전에 조대비의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잔치 없이 진하 행사만 치러졌다. 병풍의 1폭에서 7폭까지는 인정전에서 열린 행사 장면이 길게 펼쳐지고 마지막 폭인 8 폭에는 병풍을 제작하도록 했던 오위도총부의 9명의 대신 이름과 관직명이 적혀 있다. 당시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고 궁궐 경비를 맡았던 오위도총부 신하들이 국가의 경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자신들이 참여했던 행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뜻 깊은 궁중행사를 기록한 그림이었던 만큼 내용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도 화려하게 표현하기 위해 가운데 부분의 인정전을 실제보다 더 크게 배치하고 앞에서 바라보는 방식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함께 사용하였다.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1230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 憲宗嘉禮陳賀圖屛風 ) ◎ 시 대 : 조선 (1844년) ◎ 재 질 : 비단에 채색◎ 크 기 : 8 폭 병풍 . 각 폭 115.0×51.0cm ◎ 지정구분 : 보물 제 733-1호 헌종 10년(1844) 조선왕조 제 24대 왕인 헌종이 효정왕후와 치른 가례를 기념하여 제작된 궁중기록화이다. 8세에 즉위한 헌종은 정비였던 효현왕후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10월 22일에 경희궁 숭정전에서 교서를 반포하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바로 이 진하례 광경을 주제로 하여 만든 병풍이다. 제 1폭에는 진하례 때 반포한 반교문이 쓰여 있고, 제 8폭에는 선전관청의 관원 25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이 병풍은 선전관들이 주도하여 제작, 이름이 적힌 모든 선전관들에게 병풍이 나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폭에서 7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한 진하례 광경이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모두 경희궁에서 치러졌으나 그림은 창덕궁으로 되어 있다. 이는 19세기에 유행한 진하도 병풍의 특징 중 하나로 실제 의례 장소와 관계 없이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그렸다. 그림은 인정전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이어지는 전각들은 평행사선구도로 질서정연하게 그려졌다. 인정전 대청에는 금관조복 차림의 승지와 사관이 부복하였고, 북향한 대치사관은 치사문을 낭독하고 있다. 원경에 표시된 석조의 무지개 형태 문은 후원의 불로문으로 생각된다. 특별히 불로문을 그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이목구비 표현이 없으며 윤곽에 사용된 필선은 다소 뭉툭하고 굵기의 차이가 있다. 장대한 구도, 화려한 색채, 정교한 묘사로 진하라는 국가의례가 충실히 재현되었으며 국가의 가례를 축하하는 경사스런 분위기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자수 초충도 병풍 작성자 yoojin95 조회 1394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자수 초충도 병풍 ( 刺繡 草蟲圖 屛風 ) 전 傳 신사임당 申思任堂 · 申師任堂 · 申師姙堂 · 申媤姙堂 (1504-1551) 본 本 ◎ 시 대 : 조선 ◎ 재 질 : 목공단에 자수 ◎ 크 기 : 8 폭 병풍 . 각 폭 65.0×40.0cm ◎ 지정구분: 보물 제 595호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그림을 본으로 하여 수 놓은 병풍이다 . 병풍의 구성내용과 소재는 다른 초충도 그림과 유사하나 표현이 더 정교하고 섬세하며 생동감이 있다 . 제 1폭은 오이넝쿨이 화면 왼쪽부터 뻗어가고 그 아래 두꺼비가 작은 벌레를 노리고 위로 올려보며 곧추 서 있다. 제 2폭은 맨드라미꽃과 그 아래에는 도마뱀이 땅강아지를 향해 뒤돌아 보고 있다. 제 3폭은 원추리꽃이 중심에 자리하고, 뒤쪽으로 작은 들국화가 있다. 제 4폭은 덜 익은 여주열매가 달려 있고, 다 익어 땅에 떨어진 여주를 들쥐 세 마리가 파먹고 있다 . 여주는 현전하는 초충도 회화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소재이다. 제 5폭은 민들레와 큰 패랭이꽃을 배치하였고, 제 6폭은 수박과 작은 들국화, 패랭이를 함께 도안하였다. 제 7폭은 가지와 쇠뜨기, 딸기가 있고, 제 8폭은 곤충 없이 들국화만 단독으로 시문하여 전형적인 초충도 형식과 다르다. 자수바탕은 검정색 공단을 사용하여 색사를 강조하였고, 자수사는 미약하게 꼬임을 준 반푼사이다. 자수사의 색은 황색, 청색, 갈색, 자색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자수기법은 대부분 표면평수를 사용하여 면을 채우고 있으며 때로는 수직, 수평, 사선평수를 배합하였다. 이외 곤충의 몸통은 가장자리수와 이음수, 평수를 혼합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하였고, 표면솔잎수도 보인다. 토기 융기문 발 작성자 yoojin95 조회 141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토기 융기문 발 ( 土器 隆起文 鉢 ) ◎ 시 대 : 신석기시대 ◎ 재 질 : 토기 ◎ 크 기 : 높이 12.2cm, 입지름 16.2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7호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토기이다. 작은 주구(注口), 둥근 바닥, 적갈색 점토질의 태토, 융기문 장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릇 몸체 상부 표면에 V자 형의 점토 띠를 연속해서 붙인 후 그 위에 새김문을 시문하여 장식효과를 내었다. 기원전 6,000-5,000년 경에 제작된 융기문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하며 주로 발(鉢)이나 항아리 형태로 대체적으로 넓은 아가리와 좁고 평평한 바닥이며, 주로 남동부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그 중심지가 부산과 김해이다. 이 토기는 주구가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액체를 담아 따르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선동패총 유적은 지금의 영도구 영선동파출소가 위치한 곳인데 시가지 확장공사로 인해 현재 완전히 파괴된 상태이다.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 작성자 yoojin95 조회 1295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 ( 陶器馬頭飾角杯 ) ◎ 시 대 : 삼국 (5세기) ◎ 재 질 : 도기 ◎ 크 기 : 높이 14.4cm, 총길이 18.8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8호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고분군 중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총 10기를 조사하였다. 뿔잔은 제 7호분의 주곽 내부 가운데 벽 근처에서 한 쌍으로 출토되었다. 뿔잔이란 쇠뿔 모양으로 원통형 몸통에 끝이 뾰족한 형태의 용기로 액체를 따르는데 주로 사용하며 흔히 마상배 (馬上杯)라고도 한다. 이 뿔잔 2점은 크기는 서로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형태나 제작수법은 거의 동일한데 원통형 몸통 끝에 말머리와 두 다리를 장식하여 평면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성형과정에서 양질의 점토를 이용하여 조각칼로 전체 표면을 대담하고 힘찬 솜씨로 깎아 다듬은 다음, 구연부 아래는 일부 물 손질한 회전자국을 남기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 가야지역의 무덤에서 간혹 잔과 대각을 분리해서 제작한 것은 출토되고 있지만 뿔잔 몸통에 말머리를 부착하여 대각으로 삼은 예는 처음이며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현재 한 쌍 중 크기가 큰 것은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작은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쌍자총통 작성자 yoojin95 조회 1434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쌍자총통 ( 雙字銃筒 )◎ 시 대 : 조선 (1583년) ◎ 재 질 : 철 ◎ 크 기 : 길이 52.5cm, 입지름 1.7cm, 손잡이 길이 6.0cm, 총신 길이 38.4 cm ◎ 지정구분 : 보물 제 599호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휴대무기의 일종이다.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한 뒤 후미의 화약심지에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지화식화기이다. 쌍자총통은 선조대 (1567-1608)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기존의 승자총통은 사격 이후 재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조준사격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여 총신 2개를 병렬로 결합시키고 한쪽 총신에 3층으로 장전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격 가능케 한 것이 이 쌍자총통이다. 이 쌍자총통의 명문에 의하면 선조 16년 (1583)에 서가라는 장인이 만든 것으로 현전하는 쌍자총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쌍자총통은 임진왜란 때 총신이 길고 사격이 편리한 화승식화기인 조총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지만 조선의 화약병기 중 유일하게 여섯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이 가능한 개인 휴대용 무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지자총통 작성자 yoojin95 조회 1276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지자총통 ( 地字銃筒 ) ◎ 시 대 : 조선 (1557년) ◎ 재 질 : 철 ◎ 크 기 : 길이 89.0cm, 총구 바깥지름 17.2cm, 총구 안지름 10.5cm, 중량 87.0kg ◎ 지정구분 : 보물 제 863호 주철로 제작한 유통식 중화기로 포의 사정거리는 8, 9백보 (약 1km)이다. 명문에 의하면 “명종 12년(1557) 4월 김해도회소에서 주조된 지자포이며 무게는 일백사십사근육냥이고 감조관은 전 권관 이대윤 , 화포장은 김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도회란 염초 생산에 소용되는 흙과 잡물을 준비하여 생산하는 곳으로, 이곳이 김해이다. 이 총통의 길이는 89cm, 중량 87kg으로, 이 총통보다 한 달 먼저 같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총통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길이가 89.5cm, 중량 77kg으로 당시 총통의 크기는 규격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화포의 제작시기인 명종 12년은 을묘왜변 발발 후 2년이 경과한 시기로 왜구 토벌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총통 제작은 한동안 지지부진하였으나 요동지방에서 동랍철을 무역하기로 하여 명종 11년(1556)부터는 총통주조사업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배경에 의해 지자총통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지자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해 각 전선에서 주화기로 사용되어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영산회상도 작성자 yoojin95 조회 1346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영산회상도 ( 靈山會上圖 ) ◎ 시 대 : 조선 (1565년) ◎ 재 질 : 삼베에 먹과 채색 ◎ 크 기 : 227.0×188.5cm ◎ 지정구분 : 보물 제 1522호 붉은 바탕에 흰색 선묘로 여래와 다수의 성중 집회장면을 그린 석가여래설법도이다. 화면 최하단 중앙에 쓰여진 화기에 의하면 박풍산이라는 인물이 시주하여, 가정 44년 (1565) 화승 탄원이 그린 영산회도 즉 영산회 석가모니설법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불화는 16세기 전반까지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발원되어 궁정화원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일반 백성들의 발원과 승려화가 제작으로 전환되는데 이 영산회상도는 그러한 전환기를 선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그래서 붉은색 비단천과 순금 안료 대신 삼베에 흰색 안료로 표현되었고, 전통적인 석가설법도의 보살 배치에서 벗어나 아미타설법도 팔대보살의 배열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규모로 미루어 대웅전이나 영산전의 후불화로 사찰의 예배와 의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3 작성자 yoojin95 조회 1112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 3( 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三 ) ◎ 시 대 : 조선 (1422년) ◎ 재 질 : 감지에 금은니 ◎ 크 기 : 절첩 1 면 41.9×14.4cm ◎ 지정구분 : 보물 제 269-3 호 구마라집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을 감지에 은니로 쓴 것으로 1422년(세종 4) 덕명 비구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발원하여 만든 총 7권 중 권 3에 해당된다. 나머지 사경 즉 권 1(보물 제 269호)과 권 7(보물 제 269-4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권 2, 4, 5, 6(보물 제 269-2호)은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경 첫 부분은 묘법연화경 권 3의 내용을 묘사했는데 화면 오른편에는 설법도(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 왼편에는 화성유품(궁궐과 담이 있는 장면), 약초유품(용이 입에서 비를 내뿜고 있는 장면), 수기품(가섭과 부처님이 각기 설법하는 장면)이 각기 그려져 있다 . 변상도의 내용과 배치 등은 고려시대 사경변상도의 형식을 따랐지만, 도식화된 불보살 표현과 인물 크기 변화, 와문형의 구름 등에서 조선 전기 사경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 본문은 1면에 6행이 있고, 1 행에는 17자씩 은니로 경문이 쓰여져 있다. 서체는 단정한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송설체의 획을 적용시킨 글자들도 눈에 띈다. 조선 전기에는 장식경의 사례가 매우 적은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의령보리사지금동여래입상 작성자 yoojin95 조회 1317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의령보리사지금동여래입상 ( 宜寧菩提寺址金銅如來立像 ) ◎ 시 대 : 통일신라 (9세기) ◎ 재 질 : 금동 ◎ 크 기 : 높이 26.0cm, 어깨너비 5.0cm, 대좌높이 8.0cm, 대좌지름 8.5cm ◎ 지정구분: 보물 제 731호 1948년 경상남도 의령군 보리사터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으로 1981년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에 수장되었다. 현재 불상과 대좌만 있고, 광배는 없어졌다. 불상의 수인은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올려 좌우가 바뀐 시무외 여원인 (施無畏 與願印)이다. 얼굴은 편평한 방형이며 길게 선각된 눈과 세부표현이 없는 단순한 귀, 중앙으로 몰린 눈,코,입은 깊게 음각하여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느낌이 강하다. 높게 솟은 육계는 원추형을 이루며 목에는 삼도 표현이 없다. 통견식으로 걸친 대의는 양감 없이 밋밋하지만 사선의 승각기 가장자리띠에는 꽃무늬가 있고, 배 밑으로 늘어진 U 자형 옷주름은 두 줄씩 표현하여 입체감을 나타냈는데 옷주름 사이에 마치 구름형상 같은 세 개의 능선을 표현하였다 . 폭이 좁고 높은 연꽃대좌는 상·중대는 원형, 하대의 내림꽃 표현은 원형이나 그 아래 기단은 7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의 뒷면은 상을 반으로 자른 듯 넓게 패여 있어 편불형으로 제작된 주조법을 보인다 . 이 불상은 좌우가 바뀐 시무외 여원인, 얼굴과 옷 세부표현이 선각처리된 평면성, 편불형 주조기법 등이 특징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황리현명 청동북 작성자 yoojin95 조회 1585 첨부파일 0 작성일 2018.05.01 황리현명 청동북 ( 黃利縣銘 靑銅半子 ) ◎ 시 대 : 고려 (1085년) ◎ 재 질 : 청동 ◎ 크 기 : 지름 32.9cm, 측면 폭 8.3cm ◎ 지정구분: 보물 제 1810호 고려 선종 2년(1085), 지금의 경기도 여주 황리현의 호장 민씨 등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 기년명 있는 청동북 중 네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앞면에는 연과와 15개의 중판 연화문을 배치하여 당좌로 삼았고, 연화문 바깥으로 비운문을 배치하였다 . 측면에는 세모꼴 모양의 고리 2 개가 달려 있고, “대안 원년 을축년 칠월일에 황리현 호장 인용부위 민씨 등의 동량이 마음을 같이하여 반자 1구를 만들었다.”라는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대안은 요 도종때의 연호로 대안원년은 1085년이고, 황리현은 경기도 여주의 옛 고려 초기의 지명이다. 인용부위는 향리를 우대하면서 역을 징발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부여된 직위로 이 인용부위 호장 민씨가 화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때까지 청동북은 반자, 금구 등 다양한 한자로 기록되어 혼용되어 왔으나 이 명문을 통해 반자는 금구보다 큰 가장 일반적인 청동북을 지칭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리현명 청동북은 규모는 작지만 앞면 구성이나 짜임새, 명문 등에서 공예 기술적 가치가 매우 높고, 네 번째로 오래된 기년명 청동북, 고려시대 지방자치제도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인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처음 1 끝